사는 일/책

[책] 미학 오디세이

yeznable 2023. 12. 2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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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가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기분에 기록해 두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써본다.

첫 책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다.
사실 이 책을 읽은지는 10년 정도 된 것 같다.
내용이 잘 기억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못하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나에겐 이 책을 읽게된 과정에 스토리가 있어서 책의 내용을 읽는 것뿐 아니라 그 스토리까지가 독서였다고 느껴진다.
또는 이 책을 읽었던 것이 지금도 진행되는 중인 그 스토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글은 독서가 주제이니 일단은 스토리를 독서에 포함시키는 걸로 하자.



(혹시 그런 과정은 읽고싶지 않고 책 이야기만 보고 싶다면 다음 구분선부터 읽으면 된다.)
공학도인 내가 미학이라 이름붙은 책을 펴도록 이끈 것은 "미" 보다는 "멋"이었다.
중3 무렵 친형의 영향으로 스트릿아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멋있다고 느껴서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스트릿아트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한국 시골 강원도 속초에서 사는 중3 아이였다.
그냥 키워드로 검색하다가 알게된 스트릿아트 소식 관련의 한 사이트를 통해 관심이 이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아트웍을 판매도 하고 기능이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정말 소식만 전달하는 뉴스 채널이었다


해외 사이트이다보니 모든 소식이 영어였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의 나도 그림은 볼 수 있었고 작가 이름이 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POW WOW"라는 이름의 스트릿아트 행사가 있는데 당시에는 영어를 잘 모르다보니 해당 행사 관련 기사가 제목에 올라오면 그냥 감탄사인줄 알았다.
실제로 세계적인 행사에 참여한 작가들이다 보니 감탄사가 나올만한 작업물 사진이 함께 올라와서 실제 그 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기 전까지 착각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중 그 관심의 방향에 변화가 생겼다.
Ron English나 Ludo 같은 작가들이 벽화뿐 아니라 조형물을 만들기도 하고 장난감을 만들기도 하면서 이걸 Art Toy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Ron English와 Ludo의 Art Toy

그게 또 멋있어 보였다.
아트토이를 검색하면서 당시 킨키로봇 동대문점의 점장으로 일하던 부다덕의 블로그를 알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서울이 가까워졌다.
지하철을 타면 2천 원이 안 되는 돈으로 2시간 밖에 안되는 시간으로 서울을 갈 수 있다니, 엄청난 문화 인프라를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 부다덕은 이미 내 롤모델이었다.
부다덕에게 메일을 보내고 킨키로봇 동대문점을 방문했다.
관심만 있고 공부만 하던 학생이 찾아간다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냥 매장을 구경하면서 사람들이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가만 볼 뿐이었지만 꽤나 자주 매장을 찾아가서 폐를 끼쳤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모르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나나, 캠벨 수프 캔을 활용한 작품들은 많이 보면서 앤디 워홀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즈음 카우스와 같이 스트릿에서 시작해 아트토이도 만들던 작가가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걸 보았다.
스트릿아트는 길거리에서 이뤄져야 진짜라고 생각했었는데 스트릿아트와 파인아트 사이의 경계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드디어 미학 오디세이를 읽을 생각이 들었다는 기나긴 스토리다.



(책에 대한 이야기만 읽고 싶다면 여기부터 읽으면 된다.)
세권이나 되고 미술사, 미학이라는 겁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읽기 시작하는 데에는 큰 맘을 먹게 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그 양 때문에 2권에서 3권을 넘어가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책 자체는 사람 이름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걸 빼면 쉽게 읽히는 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형식으로 대부분의 내용이 서술된다.
중간중간 다른 인물들도 대화 참여하는데 모두 각자의 캐릭터가 잘 반영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재미있고 해당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플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데아와 그림자 이야기를 한다).

과거에는 화가가 철학자이며 과학자이며 정치가, 그 외에도 다양한 역할을 가지기도 했던 만큼 그 시대부터 써 내려간 이 책도 미술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생각의 역사를 담고 있다.
어느 시기에 어떤 미술의 파가 있었고 어떤 인물들이 있었으며 그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그런 배경에서 이런 그림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자세하고 재미있게 소개된다.

모든 시대의 순서나 그때의 작가들이 전부 기억나지는 않아도 전체적인 흐름이나 해당 시대의 분위기는 지금도 어떤 전시회를 갔을 때 배경지식으로 떠오른다.
그런 걸 보면 상당히 인상적이고 전달력이 좋은 책이다.



이렇게 새 블로그의 자기소개 겸 첫 독후감을 마쳐볼까 한다.
미술 전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이 책을 읽을까 싶지만 미학 오디세이를 읽으면 이후 보게 될 전시에서는 알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에 차이가 크게 날 것이라는 말로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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